반응형

개천절 우리민족의 정신 단군, 단군의식의 변천과 역사적 의미는?

 

한국사에서 최초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고조선, 그 나라의 시조는 단군왕검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가장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 이것이 역사교육의 힘이요, 공통체 의식 발현의 순간일 것이다. 과연 단군은 우리 역사속에서 어떻게 비춰졌으며, 어떤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단군에 대한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단군과 관련된 기록은 무엇이 있을까?

단군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일연저술, 고려 충렬왕때 편찬), <<제왕운기>>(이승휴 저술, 고려 충렬왕때 편찬), <<응제시>>, <<규원사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라람, 동국통감 등에 기록되어 있다.

 

각 책들에 기록된 단군탄생의 내용을 다소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인 웅녀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내용이 주요하다. 반면 <<제왕운기>>에는 환웅의 손녀와 박달나무 신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응제시>>에는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여 단군의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없다.

 

<<규원사화>>등에서는 단군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단국이라는 나라의 군주의 명칭으로 47대에 걸친 단군의 이름과 구체적인 치적을 제시하고 있다.

 

 

 

 

2.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통해 분석해본 고조선의 사회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널이 이롭게 할 만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산를 거르기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사람이 되기를 환웅에게 빌었다. 곰은 삼칠일 동안 몸을 삼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그렇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웅녀와 결혼하였다. 그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임음이 왕위에 오른지 50년째가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우선 환인의 아들 환웅이라는 의미는 청동기 시대의 선민사상을 의미하여 하늘과의 연관성을 가지려는 것이다. 환궁이 거느렸던 풍백, 우사, 운사의 기후 관련들이 곡식과의 관련성을 볼 때 농경사회를 의미한다. 환웅과 기후신의 상하관계를 통해 계급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가진 환웅부족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의미는 앞선문화를 가진 종족의 이동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편, 한반도에는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토테미즘적 신앙을 가진 후진적 사회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환웅이 곰인 웅녀와 결합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것은 선진적인 이주 세력이 후진적 토착세력과 연맹하여 고조선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 지배자를 단군왕검이라 일컬었다.

 

이는 단군의 어원이 무당, 또는 제사장이는 견해와 왕검은 정치적 군장이라는 의미로 유추하며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를 같이하였던 제정일치시대의 새로운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군왕검에 의해 건립된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나 이는 한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므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서 15세기에 나타난다고 볼 때 청동기 문화를 바탕하는 이주집단과 토착집단의 결합으로 고조선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단군의식의 변천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의 분석을 통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건립된 제정일치의 사회로 출발하였음을 알 수있다. 그럼 각 시대별로 단군의식은 어떻엑 변천되었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고려시대 이전의 단군의식은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단군신화의 내용을 미루어 고조선 사회에서의 단군은 건국의 시조이나 국가를 수호나는 신적존재로 숭배되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이후 각 국가의 시조 및 건국신화가 나오면서 단군에 대한 의식은 많이 쇠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단군에 대한 의식은 고려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 시기는 고려의 역사적 위상이 매우 흔들리는 몽고침략시기였다. 몽고의 침략으로 내부결속에 대한 의식을 강화하는 것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단군관련 기록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15세기 나라가 처음 만들어질때는 자주적 역사의식이 강화되면서 단군조선에 대한 의식이 확고해졌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에 첨성단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 등의 사실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진다.

 

또한 일제강점기로 접어드는 구한말에는 ‘단군민족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즉 나라의 주권이 상실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단군이 민족의 시조라는 의식이 더욱 확산된다. 즉 1905년에는 단기를 사용하였으며, 1909년에는 단군의 건국을 기리는 개천절 기념일, 나철 오기호등에 의해 단군을 신앙하는 대종교들이 탄생하였다.

 

이렇듯 구한말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속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는 경향이 강하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듯 단군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과정에서 끊임없이 제되었으며 국가의 시조, 민족의 시조로 그 의미를 잃지 않았다.

 

물론 단군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해석의 이견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역사에서 만큼은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요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여기는 것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300x25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