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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영화 사도,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갖혀 죽게 되었을까?

 

요즘 영화로 ‘사도’가 상영되면서 너무나 기막힌 부모 자식간의 미움과 원망이 자식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임오화변(1762년 영조38년 윤 5월 13일)은 아버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창경궁 휘령전 앞에서 뒤주에 갇혀 9일만에 아사하게 한 사건을 말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물론 사도세자와 관련된 드라마, 영화가 너무 많이 재현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사도의 죽음을 조명했을까?에 일단 관심이 몰렸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크게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증세와 영조의 변덕스러운 성격 등에 기인한 가족사에 중심을 둔 것이 있다. 반면, 역사학계 쪽에서는 왕세자의 삶이 단순한 일반 가정사의 일이 아닌 정치적 삶에 비중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정치적 관계의 역학 속에서 그 죽음을 해석하고 바라보고자 한다.

 

즉 당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과연 사도세자는 정말 광인이었을까?> 
 이번 이준희 감독의 사도는 정치적 배경보다는 ‘한중록’에 기반을 둔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가족사의 문제로 영화의 초점을 맞추었다. 개인적으로는 자식에 대한 너무 높은 기대를 가진 영조의 그릇된(?) 자식사랑과 너무 높은 기대를 쫓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들 사도세자의 심적 갈등을 무척 잘 그려낸듯했다.

 

그래서 였을까?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뭔가 끝임없이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몰아가는 장면이 꼭 내가 내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뭔가를 끝임없이 강요하는 장면 같았다. 그런 부분에서 이준희 감독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제대로 짚어낸 듯 하다. 물론 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부분을 느꼈다면 다른 부모된 자들도 영화속에서 읽어내리라 믿는다.

 
 또한 영조의 괴팍한 성격에 대해 초점을 맞춰본다. 물론 왕이라고 모든 면에서 성인군자일 순없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군왕들은 적어도 우리와 다를 텐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몇 년전 한석규가 주인공이었던 ‘불휘깊은 나무’의 세종역활에서 육두문자를 날리며 인간적 고뇌를 하는 세종의 면모는 참으로 참신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영조 역시 정사에서는 개인적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겠지만, 개인사에서는 자신의 스트레스와 짜증을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 개인적 성향까지 더해진다면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몰아가는데 분명 영조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영조의 괴팍한 행동은 영화의 여러 곳에서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않좋은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입을 헹구는 행동 등을 일삼았다. 또한 기분좋을 때 가는 문과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가는 문을 구분하여 좋고 싫음에 대한 구분을 여실없이 드러내 성격 또한 괴이하다고 하겠다.

 

영조의 재위기간이 길었기에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기를 수차례 했으며, 아들 사도의 정치적 견해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에서 화를 내며 면박과 수모를 주기를 수차례한다. 결국에는 아들이 보기 싫다며 창덕궁에서 나와 경희궁으로 가버리는 모진 아버지...

 
  자식키우다 보면, 정말 자식이 미워질때가 많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과 싸우고 있다. 아마 영조도 아버지로서의 입장에서 사도에 대한 무한기대감에 대한 상실감으로 아들을 몰아갔고, 그러한 부모의 기대에 힘겨워하며 부자지간에 보이지 않는 금이 결국 선을 넘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탕평을 유지하고자 했던 영조>
조선은 17세기에 사림들에 의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선조년간에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진 후에, 다시 동인이 북인과 남으로 나뉘어졌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이 정치적으로 제거된 이후 인조, 효종, 현종년간 동안은 서인과 남인이 공조체제를 유지하며 붕당정치가 본 궤도에 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 예법에 대한 입장을 학문적으로 다투기도 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숙종대에 오면서 붕당끼리의 첨예한 대립은 결국 붕당정치의 파국으로 치닿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의 여인들의 얘기인 ‘인현왕후전’속에서 보이듯이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씨 등의 여인들의 이야기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숙종대에는 결국 서인과 남인들의 경쟁속에서 공조체제가 깨지는 환국이 발생한다. 환국은 한붕당이 정권을 차지하면 다른 붕당의 세력을 몰아내는 형세로, 경신환국을 계기로 결국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결국 조선의 붕당은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의 형세로 붕당이 나뉘어진다. 몇차례의 환국 이후 노론과 소론 위주의 권력구도가 형성된후, 노론과 소론은 후계자의 지지가 나뉘어 졌다. 소론이 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이 영조(당시 연잉군)를 각각 지지하게 된다. 숙종사후에 경종이 즉위하면서 소론이 득세하게 되지만, 병약했던 경종이 결국은 보좌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당시 경종의 죽음과 관련해서 영조의 독살설이 나돌게 되는데, 경종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몸져 누워있자 연잉군인 영조가 간장게장을 마련하여 경종을 알현한다. 경종은 영조가 받친 간장게장을 사양하지 못하고 먹고 그날 토사광란을 일으키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된다.

 

 그 이후부터 궁궐내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단는 소문이 돌았으며, 영조는 왕위에 올라서 절대 밥상에 간장게장을 올리지 못하도록 한다.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위에 오른 영조는 누구보다 신하들에게 책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노론과 소론의 팽팽한 권력구도 속에서 줄다리를 무척이나 잘한 왕이었다.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계열의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된 이후, 영조는 탕평정책을 강력하게 펼쳐나간다. 붕당끼리의 문제가 많이 되었던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킨다든지, 붕당의 소굴로 인식되었던 서원의 수를 대폭 감소시킥고,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었던 산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노력으로 붕당의 폐해를 많이 줄어들게 만들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삶을 돌볼수 있도록 균역법(베2필내던 세금을 1필로 감축시키는 군역제도)을 통해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했으며, 신문고부활, 속대전편찬 등등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자 노력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홈페이지>


업적면에서는 영조의 업적이 어느 왕들 못지 않았으며 그만큼 조선의 정치는 안정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늘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정치를 해야했고, 노론의 지지속에서 이루어진 왕권이었기에 노론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영조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누구보다 잘 간파한 것은 아들인 사도세자 였을 것이다. 


  실록에도 보면 사도제자는 15세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민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인 영조의 정치적 입장과 달리 소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을 취하면서, 아버지인 영조와 사도세자가 정치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노론의 입장에서도 장차 앞날의 군주가 될 사도세자가 자신들과 정적인 소론쪽의 인물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사도세자가 달갑게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론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사도세자를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해야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왕와 아들의 삶이 단순히 일반가정의 부자지간의 관계속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어느 한 순간도 정치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줄타기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영조의 평생숙원사업이었던 탕평정책이 아들 사도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무너질 형국을 보게 된 영조는 아들과 여러면에서 부딪쳤을 것이고, 여러번 거듭되면서 부자지간의 정 조차도 무너뜨리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2가지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어쩌면 어느 한 측면에서 사도의 죽음을 조명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우리 인생사가 어느 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보다 사도의 죽음에 누가 되지 않게 그 죽음을 이해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정조의 행동속에서 사도의 죽음이 보다 정치적인 원인이 많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죽음을 늘 안타깝게 여겼으며 아버지를 위한 새로온 세상을 위해 화성을 축조해서 보란 듯이 노론과 그 정적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억울하게 죽은 우리 아버지!! 아버지를 위한 새로운 세상을 열겠습니다.~~ 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가족들하고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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